여러분의 배포판 선택을 위한 소개

linuxlogo

지난 글에서 리눅스 배포판 종류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소개해드렸습니다. 하지만, 배포판의 종류가 이런 것들이 있다는 정보 만으로는 내가 사용할 배포판을 선택하는데 어려움이 남아있죠. 그래서 여러분의 상황이나 성향에 맞는 배포판 선택에 도움을 드리고자 이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시작점은 하드웨어의 상태입니다. 준수한 하드웨어(i3 이상 급의 CPU, 4G 이상의 RAM)라면 아래의 설명을 읽어보시면 되고,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DSL(Damn Small Linux), Puppy Linux 등을 살펴보시는 편이 좋습니다.

자 그럼,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배포판부터 차근차근 설명드리면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은, Out of the Box라고 불리는 배포판들입니다. Out of the Box라는 표현은 보통, 설치하자마자 사용이 가능한, 박스에서 꺼내자 마자 사용이 가능한 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합니다. 아래에 적을 배포판들은 모두 설치가 완료되자마자 일반적인 용도로 사용하는데 큰 불편이 없는 배포판입니다.(개발 환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데스크탑 사용자 측면으로써의 설명입니다.) Out of the Box로 분류되는 배포판들은 대개 롤링 릴리즈 타입이 아닙니다.

(굵직 굵직한 메이저 배포판만 다루겠습니다. TOP 5 등과 같이 순위를 매기려는 것은 결코 아니며 독자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질만한 배포판만 다룹니다. 특히, BSD계열은 모두 제외합니다.)


 

ubuntu

 

네, 그 분입니다. 리눅스에 입문을 하시려는 분들은 우분투 리눅스나 혹은, 그 계열인 민트를 사용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대부분의 사용은 GUI(그래픽 UI 환경)에서 처리가 가능하고 설치도 용이합니다.


 

debian

 

우분투 리눅스는 너무 식상하다거나,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데비안 리눅스를 추천합니다. 데비안 리눅스는 GNU/Linux 배포판 중 2번째로 오래되었고, 아직도 건재한 배포판입니다. 데비안에서 파생되어 나온 우분투 리눅스마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데비안 리눅스는 견고(solid)하기로 유명합니다. 상당히 체계적인 검토와 테스팅을 거쳐 레파지토리(패키지 모음)에 올려지기 때문에, 데비안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레파지토리에서 설치 가능한 패키지라면 꽤나 신뢰하고 사용하셔도 무방합니다. 다만, 위와 같은 특징 때문에 타 배포판보다 훨씬 오래된 버전의 패키지들을 사용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etc/apt/source.list’를 편집하여 testing 버전으로 사용시 롤링 릴리즈 배포판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fedora_logo

블리딩 엣지(최신 기술, 첨단 기술)의 영역에 입장하고 계십니다. 여기까지도 엄밀히 Out of the Box 형태의 배포판이지만 최신 기능이나 패키지들을 탑재하기로 유명합니다. 페도라는 최신 패키지들을 적극적으로 공식 레파지토리에 올려두기로 유명합니다. 어느 정도 버그가 있을 순 있겠지만 사용자에게 가장 최신 버전의 패키지들을 사용가능하도록 제공합니다. Out of the Box 진영과 Bleeding Edge진영의 사이에서 정확한 스윗 스팟을 자극한 배포판으로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Arch, Gentoo, LFS까지 경험하던 중 결국 페도라에 눌러 앉았습니다. 리눅스 커널의 창시자이자 개발자인 Linus Torvalds가 과거 인터뷰에서 “데비안 설치는 너무 어렵고, 나는 개발자이지 배포판 설치 전문가가 아니라”면서 페도라를 사용하고 있음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토르발즈가 언급했던 어려운 설치 버전의 데비안은 아마도 ‘우디’ 시절로 추정하며, 그 당시엔 GUI 인스톨러가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개발을 위한 환경까지 아울러, 리눅스에 경험이 어느정도 쌓였다면 최적화된 배포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slackware.png

슬랙웨어 입니다. 리눅스의 역사에 더 매료되시는 분들은, 슬랙웨어를 추천합니다. 가장 오래된 배포판입니다. (사실 데비안과 3개월(?) 정도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다만 데비안과 슬랙웨어를 제외하고는 당시 출시된 배포판은 대부분 소멸되거나 다른 방향으로 변화해왔습니다. 원래의 철학과 모습을 유지하는 배포판은 슬랙웨어와 데비안 뿐으로 생각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최초의 배포판을 ‘Boot Root’로 생각할수도 있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의 배포판으로써는 슬랙웨어가 확실히 최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패키지 매니저는 pkgtool 과 slackpkg가 있습니다. 의존성을 직접 체크, 컴파일해야하는 패키지 매니저와 현대적인 의존성 체크와 바이너리 인스톨을 가능하게하는 패키지 매니저 둘 모두를 지닌 매력적인 배포판입니다. 데비안과 마찬가지로 올드한 패키지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 번쯤, 경험해보면 좋을 배포판입니다.

(한국 미러가 없습니다. KAIST측 문의를 했고, 검토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7a9cb-13zj0sqjigkmcfohq0u2h5w

지금부터는 롤링 릴리즈 타입입니다. 본인이 어느 정도 리눅스를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설치는 CLI(커맨드 라인 인터페이스)로 진행하며, 기본 설치가 완료되어도 베이스만 설치되어있을 뿐, Xorg와 데스크탑 환경이나 윈도우 매니저도 직접 설치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본인이 성공적으로 데스크탑을 완성하더라도 이 것이 어느정도나 안정적이고 보안에 취약한지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커뮤니티에선 “작동한다면 된거다”라고 하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인 분들은 상당히 성가신 부분일 수 있습니다. 패키지 매니저인 pacman은 C로 쓰여 상당히 빠릅니다. 롤링 릴리즈타입으로 특정 버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하면서 굴려 나가는 배포판입니다. 따라서, 롤링 릴리즈가 아닌 배포판들이 갖는, 메이저 업데이트 때의 충돌 위험 등을 고려하면 상당히 마음 편한 배포판입니다. (아치 리눅스 설치 방법)

(현재 카이스트 측 미러가 403에러를 뿜습니다. 카이스트 측에 문의를 드렸고, 권한 관련 오류 확인 되었고, 수정한다고 답신이 왔습니다.)


 

gentoo

네 애증의 젠투입니다. 젠투도 롤링 릴리즈입니다. 심지어, 아치와 마찬가지로 모든 설치는 CLI에서 진행하며, 설정도 직접 해주셔야 합니다. 아치보다 더 나아가 모든 패키지는 소스 코드를 다운 받아 직접 컴파일 합니다. 젠투 리눅스부터는 하드웨어의 영향을 좀 받습니다. 2 core 노인 CPU로 KDE Plasma 메타 패키지 컴파일에 2700여 분이 소요되고, KDE Framework 컴파일에 3400여 분이 소요됬던 사진은 페이스북에 업로드해드렸습니다. 재밌는 점은 하드웨어가 받혀준다면 사용하는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i5-4세대 CPU로는 위의 패키지들 컴파일에 30여 분이 소요된 것으로 추정합니다.(정확한 측정은 하지 못했습니다.) USE플래그를 활용하여 각 패키지별로 본인이 사용할 기능과 그렇지 않은 기능을 포함/미포함하여 컴파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CPU가 워크스테이션 급이 아닌 분들은 한 번쯤 사용만 해보시고 바이너리 배포판(위의 배포판 모두)을 사용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급하게 ATOM에디터가 필요해서 $emerge -s app-editors/atom 이후, ~amd64로 마스크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의존성 패키지의 마스크까지 ‘/etc/portage/package.accept_keywords’에 언마스크해준 이후, 컴파일을 시작하여 컴파일이 완료될 때 까지 개발을 못하고 있는 상황에 처하자마자 페도라로 돌아갔습니다. (젠투 리눅스 설치 방법, 젠투 홈페이지의 iso는 UEFI 부팅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아치 리눅스등의 iso를 통해 UEFI/GPT파티션으로 설치가 가능합니다: 해당 방법 설명)


lfs

LFS(Linux from Scratch)입니다. 완벽히, 학습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치 이미지(iso)파일도 제공되지 않고, 책을 보면서 설치합니다. 설치 환경 조성을 위해 ‘/mnt/lfs/tools’ 디렉토리를 생성하여 그 곳에 GCC등의 필수 패키지를 컴파일(호스트 PC의 GCC와 다른 필수 패키지들의 설정과 버전 등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해 놓은 후, /tools의 패키지들을 이용해 /mnt/lfs의 베이스(다시, GCC와 나머지 필수 패키지)를 설치하고나서, 추가로 필요한 패키지들을 베이스 시스템의 GCC를 이용해 컴파일합니다. 추후에, BLFS 등에서 Xorg와 데스크탑 환경 등 까지도 컴파일할 수 있습니다. 젠투를 위시한 여러 배포판들은 사실상 LFS와 BLFS, CLFS 등과 같거나 유사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 배포판 들 입니다. 배포판 제작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LFS를 통해 공부,연구 하셔도 무방할 듯 합니다. 젠투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젠투 부터 아래로는 모두 CPU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습니다.


여기까지 굵직한 배포판들의 간략한 소개를 드렸습니다. 이 글을 통해, 여러분들이 사용하실 배포판 선택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인 소망이지만 대한민국에 Daily Machine으로써의 리눅스 사용자가 더욱 더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logorealfinal

책은 읽어야겠는데 시간이 없다?

책은 읽어야겠는데 시간이 없다는 말

logorealfinal

오늘은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 적어보았습니다.
다만,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독서 방법론이 아니라
왜 “시간이 없어서 책을 못 읽는다“는 말이
변명에 불과한지 조목조목 따져보기로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성실하기로 유명한 A군은 목표를 세웠을 경우 100% 달성한다고 하자. 하지만 일반적인 우리와 비슷한 B군은 목표를 세울 경우 75% 정도는 달성한다고 하겠다. 아래 이어지는 내용은 A군과 B군의 경우에 얼만큼의 독서가 가능한지를 수치화해본 결과에 해당한다.

본인이 B군이라고 생각하면 아래의 수치 중 B군의 독서량에 주목,
이제부터라도 나는 열심히 독서를 해봐야겠다, 그럼 얼마나 읽을 수 있겠는가?가 궁금한 분들은 A군의 독서량에 주목.

 

하루

우선, 하루에 30페이지 읽는 것을 기본으로 설정하여 계산해보았다. 하루에 30페이지가 버거운 독자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혹, 이것마저 버겁다면, 오전, 오후, 취침 직전으로 10페이지로 나누어 생각해보시기를 바란다. 생각보다는 참 적은양이다.

 

한 달

하루에 30페이지 독서를 기준으로 1달을 지속하는 경우,
A군의 경우 900페이지(30페이지 * 30일), B군은 1달에 675페이지(75% * 30페이지 * 30일).

 

일 년

이 것을 1년간 지속. A군은 10,800페이지(상기 결과 * 12개월), B군은 8,100페이지.

 

1년 결산

자, 1년간의 성과를 짚어보자.
기본적인 문학(단편 소설류) 서적 한 권의 페이지 수를 150~300페이지로 가정하면
A군이 36권~72권. B군도 27권~54권을 읽는다.

기본서나 대학 전공 서적의 경우 기본적으로 500~1000페이지 사이에 해당하는 책으로 놓고 보면, A군이 10.8권~21.6권,
B군도 1000페이지 책을 무려 8.1권이나 읽는다. 500페이지는 16.2권.

 

비판

맞다. 책은 권수가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하고 내용이 깊은 책일수록 다시 읽고, 음미해봐야한다. A권의 경우 3회독씩을 진행했다고 가정해도 1년간 1000페이지 기준 3.6권, 혹은 소설만 읽는 경우 150페이지 소설 24권을, 전체 3회독 할 수 있다.
왠지 친숙한 B군은 어떨까? 1000페이지 기준 2.7권, 소설의 경우 18권을 3회독으로 읽었다.

회독을 하여도 권수가 부족해보이지 않는다.

 

10년 단위

이렇게 10년, 20년, 30년이 흐르고 나서 두 명의 독서량은 어떻게 될까

A군

기간: 총 페이지 / 150p 권수 / 1000p 권수 / 150p 3회독 권수
10년 : 108,000 / 720권 / 108권 / 240권
20년 : 216,000 / 1440권 / 216권 / 480권
30년 : 324,000 / 2160권 / 324권 / 720권

 

B군

기간: 총 페이지 / 150p 권수 / 1000p 권수 / 150p 3회독 권수
10년 : 81,000 / 540권 / 81권 / 180권
20년 : 162,000 / 1080권 / 162권 / 360권
30년 : 243,000 / 1620권 / 243권 / 540권

 

읽을 책?

좋다. 시간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은 확인했다. 다만 도대체 무슨 책을 읽어야할까? 온라인에는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추천 도서목록이 있다. 그 중에서 하나씩만 골라서 읽어보더라도 시작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더욱 관심이 가는 장르가 있을 경우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도 괜찮다.

[영문 추천 도서 목록 / 국문 추천 도서 목록(국립중앙도서관 사서 추천 목록)]

 

나는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겠다.

상관없다. 다만, 이 페이지는 내 공간인 만큼 내 주장을 하는 것 뿐이다. 최소한 추천받는 책이라면 읽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본인이 좋아하는 책과 빈번히 추천되는 책 사이의 비중을 조절(7:3/6:4)하든지, 혹은 하루에 30페이지로 가정한 기본값을 단순히 2배로 늘려 60페이지를 읽으며 반은 좋아하는 책, 반은 추천받는 책을 읽든지 본인의 결정에 달렸다. 이 글을 시작한 논지 자체는, ‘책을 읽을 시간은, 사실, 절대 부족하지 않다‘라는 것이었다.

desk

0. Blueprint

The Council – Lux, Fati and Veritas

1. 3/15-10:00 회의

2. 내규, 목적 등 확정

 

thecouncil_logo.png

LINUX에서 WIFI 사용 총 정리

linuxlogo

LINUX에서 WIFI를 이용하는 것,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CLI환경에서 몇 가지의 커맨드만을 이용해서 WIFI를 사용하는 방법을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친숙해지셔야할 명령어입니다.

  • ipconfig
  • iw dev
  • wpa_supplicant

(기본적으로 본인 하드웨어, 즉, 와이파이 장치의 드라이버가 로드되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장치의 드라이버는 대부분 배포판에서 모듈로써 설치되어 인식되자마자 로드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부분을 신경써주셔야 할 배포판은 아치 리눅스(아치 리눅스도 사실 범용 드라이버는 문제 없다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젠투 리눅스 및 슬랙웨어, BSD계열 혹은 LFS입니다.)

  1. 드라이버
    기본적으로 본인의 Wireless 드라이버가 설치되어 로드되는지 확인해야합니다. 각 배포판에서 제공하는 Linux-firmware가 설치되어 있다면 대부분의 무선 장치는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래의 커맨드를 입력해 봅니다.

    $lspci -k

    아래와 같은 부분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06:00.0 Network controller: Intel Corporation WiFi Link 5100
    Subsystem: Intel Corporation WiFi Link 5100 AGN
    Kernel driver in use: iwlwifi
    Kernel modules: iwlwifi

    위의 정보에서 1) 네트워크 컨트롤러가 어떤 것인지, 2) 커널 드라이버가 어떤 것이 사용되고 있는지, 3) 커널 모듈의 이름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위의 예에서는 Intel WiFi Link 5100이라는 이름의 하드웨어가 사용되고 있고, 커널드라이버는 iwlwifi가 사용되며, iwlwifi에 해당하는 모듈의 이름은 iwlwifi입니다.

    다음의 명령을 통해 인터페이스의 이름이 무엇으로 적용되었는지 확인합니다.

    $ipconfig

    기본적으로 아웃풋을 눈여겨보시면

    eth0       Link encap:Ethernet ~~
    inet addr:192.168.0.194 Bcast:192.168.0.255 Mask:255.255.255.0
    (추가적인 정보들)

    lo            (지금은 모르셔도 되는 추가적인 정보들)

    wlan0    Link encap:Ethernet Hwaddr~~
    (아래로 추가적인 정보들)

    위와 같이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eth0에 해당하는 여러분의 장치명(예를 들어, enp2s0일 수도 있고, enp0s3일 수도 있고)은 유선 연결 인터페이스명에 해당하고 wlan0 부분에 해당하는 여러분의 장치명(예를 들어, wnp2s0 혹은 wlp0s2 등)은 와이파이 장치의 인터페이스 이름에 해당합니다. 이 인터페이스 이름을 잘 기억해두시거나 적어두신 후에 아래를 진행합니다.

  2. 인터페이스 켜기
    이제, 해당 장치의 인터페이스를 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장치를 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반드시 아래 예시의 wnp2s0부분에는 위에서 확인한 본인 와이파이 장치의 인터페이스 이름이 들어가야합니다. 아래에서 계속 동일합니다. 

    $ip link set wnp2s0 up
  3. 정보 입력
    1. 본인의 와이파이 이름을 모르는 경우
      $iw dev wnp2s0(본인 장치명) scan

      위의 명령어를 통해 와이파이 장치가 주변의 와이파이를 스캔할 수 있습니다. 결과물 중, 본인이 연결하고 싶은 와이파이 이름을 확인합니다.

    2. 본인의 와이파이 이름과 비밀번호를 모두 아는 경우

      /etc/wpa_supplicant.conf 라는 파일을 만들어줍니다. 이것은 추후에 와이파이 연결을 용이하게 하기위함입니다.

      $vim /etc/wpa_supplicant.conf
      
      ###파일 내부에 아래와 같이 적습니다.
      ###ssid와 psk는 모두 예시입니다.
      ###본인의 것으로 대체하시면 됩니다.
      network={
           ssid="olleh_WiFi_FG03" 
           psk="0000008714"
      }

      이후, 아래를 진행해주시면 됩니다.

      $wpa_supplicant -B -i wnp2s0(본인 장치명) -c /etc/wpa_supplicant.conf
  4. IP 받기-DHCP를 이용하는 경우
    $dhcpcd
    or
    $dhcpcd wnp2s0(본인 장치명)

 

확인은 물론 아래와 같이 합니다.

$ping -c 3 www.google.com

 

끗!

logorealfinal

맹모삼천지교

desk

이번에는 제목을 내가 하려는 얘기와 동떨이지게 달아보았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동떨어진 것은 아니고 가만히 생각하다보니 여기까지 이르렀다.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 :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에게 훌륭한 교육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세 번 이사한 일. 처음에 묘지 근처에 살았더니 맹자가 장사(葬事) 지내는 흉내를 내므로 시전(市廛) 가까이로 이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물건을 사서 파는 흉내를 내므로 다시 서당(書堂) 가까이로 이사를 했더니 예의범절을 흉내 내므로 그 곳에 거처를 정했다고 함. 교육에는 환경적 요인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음

최근에, 일하는 곳에서 인력이 더 필요해 구인을 하고 있다. 구인 공고를 내자마자 굉장히 많은 이력서가 날아들었고, 검토를 도우면서 느낀 것이 참 훌륭한 인재가 많다는 것이었다. 나도 아직 한참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는, 학자금과 관련해 장학금 및 대출 제도에 대해서 문의하느라 방문한 곳이 있었다. 그 곳에는 정말 형편이 안 좋은 학생들이 많았다. 나는 참 행복한거구나 하고 느꼈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놓고 보니 또 재밌는 생각이 났다. 맹모삼천지교였다.

사실, 그렇게 잘난 사람이 많거나, 모두가 그렇게 생활 형편이 힘들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상황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유사한 상황에 놓인 사람만 보일 거라는 점이다. PC방만 들락거리면 모두가 게임만 하고 사는것처럼 착각할 것이고, 학교 도서관만 들락거리면 모두가 매일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보일 거라는 말이다.

아니다. 결국 타인은 한 개인을 끊임없이 추적, 관찰할 수 없다. 전체를 보는 것 뿐이다. 어제 본 도서관의 100명 중에서 오늘 보고 있는 100명중에 몇 명이나 동일인일까? 관광지는 같은 측면에서 더욱 심각하다. 라스베가스의 도박장에서 오늘 본 1000명 중에서 몇 명이나 어제도 이곳에 있던 사람일까? 자칫 본인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모두가 그런 환경에 처해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뜻이다.

결국, 내가 보는 관점에 매몰될 가능성이 있다면, 즉, 환경에 휩쓸릴 가능성이 있다면 환경 자체를 나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것이 좋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You are the average of  the five people, you spend the most time with” – Jim Rohn

“당신은 당신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5명의 평균이다”

유명한 위의 인용구와도 일맥상통하는 바이다. 결국은, 내가 향하고자 하는 목표에 어울리는 환경과 주변 인맥에 휩쓸려 있어야 그 곳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누구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지, 혹은, 게임 등에 빠져있느라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이가 아예 없지는 않은지 고민해볼 좋은 시점일 것이다.

logorealfinal

기회, 목표, 성공에 대하여

desk

서문

처음에는 기회의 측면에 대해서 적기 시작했는데, 수정하고 수정하다보니, 목표를 잡는 방법, 그리고 두 가지 대비되는 사고방식(고정형과 성장형)에 대한 이야기까지 추가되어 매우 방대해졌다. 그로 인해 본의 아니게, 서문을 추가하고, 형식을 바꾸다보니 게시 시점이 더욱 늦어지게 되었다. 다만, 여러차례 다시 읽고, 수정을 거듭한 끝에 오랜 시간 고민해 왔던 문제에 대해서 잘 다듬어진 글이 탄생한 것 같아 기쁘다. 가까운 지인들은 알겠지만, 여기에 적힐 내용에 대해서 굉장히 오랜 시간 고민을 해왔다. 고민하기를 수 년에, 글로 옮겨 놓고 수정을 2달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결론을 내렸고, 포장을 하여 여러분께 선보인다. 내용이 예민한만큼 부디, 오해 없이 전달되기를 바랄 뿐이다.

 

기회에 대하여

 

1.내가 주는 기회

지금

누구를 만나든지 섣불리 판단하지 마라. 현재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최소한 대화해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가 없다.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은 단순한 대화 뿐만 아니라 꽤나 긴 시간 곁에서 겪어본 이후에 진실된 모습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부는 그 과정을 겪으면서도 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누군가를 판단하지 마라.

#예. 지인 중 한 명은 집안 형편이 좋은 편에 속한다. 다만, 어린 나이부터 유복한 집안 환경을 보고 접근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보니, 겉으로는 오히려 부족해 보이게 하고 다닌다. 함께 다니다보면, 드러내놓고 이 친구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참 재밌는 노릇이다. 과연, 그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걸까? 그들은 이 친구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모르지 않는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그렇게도 중요하다는 말인가?

후에

지금 마주친 사람이 당장에 나와 관계 없고,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이 없을지 몰라도, 그 사람이 나중에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변해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감히 누군가의 미래를 평가하려고 하지 말자.

#예. 일전에 2시간 거리의 면접 장소에서 면접 시작 5분만에 탈락한 적이 있었다. 면접 시작과 동시에 어떤 기술에 대해서 익숙하냐고 묻더니, 모른다고 답하자 너는 이 기술을 모르니 너를 뽑을 생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다시 읽어본 채용 공고 어디에도 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라는 내용은 없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깔끔했다. 다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 재미있었다. 내가 이 업무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추가로 공부하고 연구할 생각인지, 혹은 나는 어떤 태도를 가진 사람인지, 지금 당장 그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하게 된 이유라도 있는건지, 있다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전혀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너는 이 기술이 없으니 가라. 깔끔했다. 당연히, 그 일이 있은 후 몇 주에 걸쳐, 이 분야에서 일을 하려면 필요하겠다는 판단하에 그 기술을 공부하고 습득하였다.

위는 모두 내가 다른 사람에게 부여할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다. 당신도 누군가에게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다만, 사회의 누구도 위의 것들을 기회 제공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뿐이다. 능동적인 기회만이 기회가 아니다. 내가 여유가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투자할 수 있고, 채용해줄 수 있는 것만이 기회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수동적 기회 제공이 있다. 내가 저 사람에 대해서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유보해둠으로써 그가 원하던 것을 이루어낼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기회. 그것도 당신이 타인에게 제공할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기회인 셈이다.

 

2.나에게 주어진 기회

예전부터

지금의 당신은 당신이 투자한 시간의 총합이다. 당신에게는 항상 기회가 있었다. 제발, 세상을 탓하지 마라. 남을 탓하지 말고, 환경을 탓하지 마라. 현재 “(당신의 나이-7) X 365 X 24” 를 계산해보면 당신이 충분히 학습이 가능해졌다고 가정할만한 나이인 8세(혹은 그 이전) 부터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을 알 수 있다. 그만큼의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들을 투자하여 현재의 당신이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탓하지마라. 기회는 항상 당신 앞에 놓여있었다.

환경 탓에 대해서 조금 더 적어보고 싶은데(‘기회’라는 주제에는 벗어난 측면도 있어 보인다만), 죽지 않고 살아서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이 글을 읽는 시간에 본인이 해야 하는 일을 하자. (심지어 본인이 사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모르고 있다고? 가슴 깊숙이 들여다 보아라. 심장의 소리를 들어보면 내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하는지 다 안다.)세상에는 무조건 지금 본인보다 더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개인이 존재한다. 무조건 아래를 기준으로 삼고, 너는 행복하다 라고 판단해야 한다는 세간의 말에 나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중잣대를 나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중잣대를 엉뚱하게 민생,경제,치안,안보와 관련한 토론 때에나 사용하고 정작 자기 발전을 이용해서는 사용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위에서 언급한 토론 등에서는 이중잣대를 엄격히 배척하고, 엄정하고 논리적으로 토론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생활함에 있어서는 이중잣대를 현명하게 활용할 줄 아는 것도 좋아보인다는 말이다. 내가 힘들다고 생각하거나, 너무 고생하고 있다, 혹은 내가 처한 환경이 나에게 도움이 안된다 등의 진부한 남탓을 시작할 때에는 잣대를 아래에 맞출 필요가 있다. 무조건 나보다 힘든 사람은 있다. 나는 행복한 편이다. 기준을 해외로 넓힐 수록 더욱 그렇다. 다만, 정신을 차리고, 동기 부여가 완료된 상황에서 목표를 정할 때에는 그 목표를 높게 잡아야 할 것이다. 잣대가 위로 맞춰질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혹은 관심 있는 분야에서 최대치에 있는 사람에게 기준을 맞추고, 저 사람 만큼 혹은 더 크게 성공할 것이다 라고 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도

간혹, 나에게 공부 방법을 묻는 친구들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질문 방식에 대표적으로 두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영어 공부 어떻게 하면돼?”

이런 질문을 하는 부류를 수도 없이 만나왔고, 꽤 많은 사람들은 그 학습을 지속하지 못하고 있는 결과를 보았다. 심지어 이런 유형의 질문은 본인이 진심으로 학습을 원하는 경우, 몇 분의 투자만을 하더라도 온라인에 수도 없이 많은 양의 정보와 자원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더욱 의미가 없다.

“내가 영어 공부를 해보려고 했는데, 이 부분을 모르겠는데 무슨 뜻이야?”

“내가 영어 서적을 찾아봤는데, A,B,C 이런 책들을 추천하던데 너는 어떤 책이 좋다고 생각해?”

개인적으로, 아주 도와주고 싶게 만드는 질문이다. 본인이 어떤 학습을 하고 싶어서 덤볐으나 막히는 부분이 이러하니 이 것을 도와주길 바란다는 형태의 질문은 본인이 가능한 선에서 충분히 노력해봤고, 그럼에도 막히는 것이 있다는 의미가 되므로 도와주는데 거리낌이 없도록 해준다. 추가적으로, 어떤 것들을 찾아 봤고, 어디에서 찾아 봤고, 그 결과가 어떠했다는 것이 추가될수록 본인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으므로, 대답하는 사람에게 추가적인 정보가 된다.

후자의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자. 지금 어떤 것이 필요하거나, 앞으로 그 것을 필요로 할 것 같으면, 열심히 찾아보고 공부하고 읽어라. 무작정 누군가가 나타나서 혹은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져서 그것을 해결해줄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그것은 오히려 그 상대에게 나의 무책임함과 나태함을 드러내며, 민폐를 끼치는 일일 수 있다. (추가 : 질문을 활용하는 방법)

 

 

 

목표에 대하여

먼 미래부터

최종적으로 원하는 바를 설정하고, 그 것을 이루기 위한 전단계들을 통해 서서히 중/단기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중/단기 목표들을 각각 달성하기 위해서는 현재 내가 시간과 비용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해야하는지 윤곽이 잡히게 마련이다.

30분 후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똑똑하도록 살아라

(웹상에서 이런 구절을 본 적이 있는데, 찾으려고 하니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의 시간을 잘 활용하여 30분 후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알고, 현명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 시간들이 모두 누적되었을 때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목표는 높게 잡아라

무조건 목표는 높게 잡아라. 나는 애매한 목표를 잡은 후에 성취하는 것보다, 높은 목표를 잡은 후에 실패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부류에 속한다. 30의 목표를 잡은 후에 성공하는 것보다는, 500의 목표를 잡고 실패했지만 230이라도 이룬 것이 낫지 않을까?

허무 맹랑한 목표를 잡지마라

황당할 것이다. 목표를 높게 잡되, 허무 맹랑한 목표를 잡지 말라니.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높은 목표이지만, 세분화해서 현실화가 가능한 것들로부터 쌓아 올라갈 수 있는 목표를 잡으라는 말이다. 모든 일은 idea로부터 시작된다. 그 아이디어는 정밀화 되기 전까지 매우 투박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잘게 쪼개고, 쪼개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지금부터 준비할 수 있거나 실행할 수 있는 규모로 작아질 것이다. 그 것들부터 다시 시작해서 위로 하나씩 조립해 나가는 것이다. SpaceX, Tesla. 이루어온 것들을 천천히 되짚어보면 모두 비슷했다. 우주 산업과 전기 자동차 분야를 도전하겠다는 idea에서 시작해서 그것들을 다시 아래로 끌고 내려온 이후에 지금 가능한 것부터 거꾸로 성취하며 조립해 올라갔더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허무 맹랑한 목표를 잡아라

… . 시간은 흐른다. 내가 지금 아무리 잘게 쪼개보아도 더 이상 현실적으로 가능한 조각들로 쪼개지지 않는 idea라고 하더라도, 가슴 한켠에 항상 품고 있어라. 50년, 60년, 심지어 70년이 지나고 나서 인류가 어느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을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진공관 수천개를 연결하여 컴퓨팅을 하던 시절이 불과 60년 전이다. 지금은 나노미터의 공정을 활용하여 CPU를 제작하고 있다. 반 세기 전, 현대의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 동시 작업 제조 공정을 상상하던 젊은이가, 도저히 현실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꿈을 포기했다면 현대의 노인이 되어 얼마나 많은 한을 품게 될까.

 

 

 

근데, 너는 안된다.

 

내가 주변 친구,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있다. “그래도 너는 안된다.”. 아마 아주 가까운 친구들은 위 인용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내가 무슨 얘기하는지 알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얘기를 듣기 귀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나는 저 문구에 굉장히 매료되어있으므로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그래도 너는 안된다”라고 해준다. 너는 안된다. 이 말을 듣고 불쾌하거나 분노해서 열심히(지금까지 열심히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하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래도 안된다. 본인이 살아왔던 삶에는 관성이 존재한다. 동기부여 영상들 아무리 많이 봐도 안된다. 유투브에 소중한 영상 하나가 업로드 되어 있는데 바로 메가스터디 손주은 대표가 재수생 오리엔테이션 수업에서 한 말이다. “너희들 지금 막 불타오르고 그러지? 오리엔테이션 끝나고 문닫고 나가면서 까먹어! 까먹는다니까? 이거 ** 지금 막 불타오르고 그래도 1시간도 안가. 기억해.”  안된다. 이렇게 안된다고 하면, 정말 분노하는 시점이 온다. 다들 그랬다. 내 앞에서 얼굴 붉어지고 본인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본인은 아니라고 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지금 정말 변화했다고 인정할 만한 사람은 아직 단 한 명도 없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될 것이다. 이 얘기를 정확히 인지하고, 그래 내가 그 첫 번째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하면 변화할 수 있다. 그러면 된다. 그게 필요해서 자꾸 저 얘기를 하는 것이다. 진정한 변화는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던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거꾸로 얘기하면 내가 죽을만큼 절박하거나 그 변화가 필요하지 않은데 말로만 ‘난 달라질 것이다 ‘라고 읊어봐야 전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정말 바뀌어야 한다. 변화해야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래도 안 된다. 자 이제 다시 이 문단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된다. (이것이 재귀함수다.)

바로, 당신이 ‘감히 누군가의 미래를 평가하려고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맞다. 내가 그런 말을 적어두었다. 게다가, 이 글에서 말이다.

앞뒤가 다른 것 아닌가?

아니다. 저 말은 그 사람을 모를 때에 대해서 한 말이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어떤 사람인지도 모를 상태에서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거나, 혹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핵심으로 작용하는 태도(근면,성실함 등)가 충분히 결격되어 있을 때에는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이전에, 실패한 사업에서 개발팀에 속하는 인원중 한 명이 본인은 수면이 무조건 12시간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도 좋다. 문제는, 깨어있는 12시간 중에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점이다. 도대체 무슨 개발을 하겠다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다. 변화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그 사람은 안된다.

 

 

능력 VS 노력

고정형? 성장형?

평소에 도움이 필요하거나 조언이 필요할 때 자주 찾는 듬직한 동생이 한 명 있다. 그 친구는 (흔히 말하는) ‘계몽주의자’다. 모두는 변화할 수 있고, 계기가 있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한다. 간혹, 얘기가 진지해질 때면, 심각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나는 확실히 ‘계몽주의자’는 아니다. ‘GRIT’이라는 책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정형 사고방식과 대비되는 유형으로 성장형 사고방식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책에서는 고정형 사고방식은 인간의 지적 능력 뿐만 아니라 성취할 수 있는 한계점이 고정되어 있고, 선천적이라 본인의 노력 여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성장형 사고방식은 내가 노력하기에 따라 그 한계점은 변화할 수 있는 것이므로, 항상 무언가 잘못되거나 성취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에는 자기 성찰을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런 차이점으로 인하여 고정형 사고방식은 피해야 할 것, 성장형 사고방식은 적합하고 추구해야 할 것으로 소개해두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나는 양쪽이 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능력에는 확실히 차이가 존재하고, 그 차이를 극대화 시키는 것은 노력이 맞지만, 대부분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 언저리에 머무는 사람들은 다 본인이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의 최대한을 이용하여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산출물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은 능력을 이용하지 않고는 해석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그 능력은 사람마도 다 다르게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쉽게 얘기하면, 각 분야에서 100까지의 성과가 가능하다고 할 때, 예를 들어, 95이상의 성과는 그 분야에 대한 능력이 월등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이 단순히 노력만으로 성취할 수는 없는 성과라는 말이다. 그리고, 95이상의 성과를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략 80 이상 수준의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가정할 때, 81,82,…99의 능력을 가진 야망있는 모든 유망주들은 하루의 시간을 최대한 투자하여 노력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운이 가미되면서, 산출물이 등장한다. 특정 분야에 대해서 65 정도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 95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과 경쟁해서 승리를 거두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더 노력해야 하고,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95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그 유망주도, 본인이 그 분야에 매료되고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과 노력에 투자할 것이다. 둘이 가진 시간은 물리적으로 24시간으로 동일하다. 둘이 연습한 시간의 차이가 존재해야 그나마, 능력의 차이를 메꾸어 나갈 수 있는데, 그것 자체가 힘들다는 말이다. 결국, 95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해당 분야에서 95이상의 성과를 도출해낼 수 있지 않을까?

우선, 인용을 조금 해보겠다.

고정형 사고방식은 자신의 존재를 한정짓는다. 성공을 했을 때는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실패를 경험하면 자신의 존재에 결함이 있다고 느끼고 결국 자아의 위협을 느끼며 정체성의 위기가 오게 된다. 실패의 순간에는 뇌의 활동이 자기 자신에게 매몰되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배우는 데 활용되지 못하며,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게 되어 새로운 전략을 과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성장형 사고방식은 자신을 한계짓지 않고 실패를 더 큰 자아로 성장하기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이 아이들은 역경을 맞아도 정체성의 위기를 겪지 않으며, 자기가 성장하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장애물로 생각한다. 그래서 도전을 주저하지 않고, 피드백을 발판으로 새로운 전략을 과감히 구사한다. 결국 성장형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성공한 사람들의 예를 들어서, 그들이 대부분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윤리학적,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큰 자극을 줄 수 있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꽤나 오랜 시간에 걸친, 그리고 양적으로도 풍부한 연구 결과들을 내포하고 있고, 근거도 충분해 보인다. 다만, 내가 저런 논의 자체를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는 그 시작점에 있다.

최고를 바라고 꿈꿔왔던, 그리고 그 자리를 위해 노력했던, 즉 최고의 자리에 이르지 못 한 수 많은 사람들은 정작, ‘고정형 사고방식이 맞을 수 있겠다’ 라는 의구심을 품고는 했다라는 점이다. 고정형 사고방식의 개요를 확장하면, 개인의 지적 능력이나 특정 분야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능력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성장형 사고방식의 잣대를 그대로 들이밀면, 챔피언스 리그에서 활약하는 4강에 오를 수 있는 팀들의 선수 개개인과, 그 바로 아래인 4강에서 16강에 해당하는 팀들에 속해있는 선수들의 ‘노력’이 부족하다. 그들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고, 그래서 결과가 모자란 것이다.

아! 팀스포츠라서 다를까? 개인 스포츠를 예로 들어보겠다. 전세계의 온갖 개인 종목 프로 스포츠의 1,2위와 나머지 그 아래의 모두는 ‘노력’에 차이가 있었다. 선천적으로 동일했지만, 나머지는 ‘노력’이 부족했다. 성장할 수 있는데, ‘노력’이 부족해서 그 성적에 그쳤다.

아니다

일반 대중이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성장형 사고방식은 매우 적합하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내에게 할당된 업무를 수행하고, 월급을 받고나서 가정을 꾸리는데에 있어서, 성장형 사고방식은 매우 유리하다. 내가 노력하면, 더 높은 직책에 도달할 수 있고, 내가 근면하면 운동할 시간을 마련할 수 있고, 운동을 통해서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고, 부지런하면 주말에 조금 일찍 일어나서 독서를 한 후에 가족과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다.

거기까지가 끝이다

성장형 사고방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끝없이 향상시키던 사람들은 그 한계점에 부딪히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대결이 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유전자, 능력 자체가 다르다.

심지어는 나보다 월등한 (제발, 부탁이다. 정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여기서 얘기하려는 ‘월등한’은 유전적 우월주의나 인종차별이 절대 아니다. A와 B라는 축구 선수에게 축구에 필요한 유전자의 차이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한 쪽이 축구 유전자에서 앞선다고 유전자 전체가 앞선다는 의미가 아니다.) 능력의 유전자를 가진 그 사람도 내가 한 것만큼 혹은 그 이상의 노력을 한다. 그게 문제다. 나만 노력하는게 아니라, 모두가 최대의 노력을 하는데 결과 산출물이 다르다. 거기서 고정적 능력치를 대입하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성공한 사람들을 조사해보니 성장형 사고방식이더라, 에서 그치면 안된다. 그것은 기만과 다를 바가 없다. 최소한, 양심이 있다면, 그 뒷 이야기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능력이 월등했는데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진 것 뿐이다.

최고를 꿈꾸는 사람들에 한해서, 모두가 노력하고 있는 현 시점에, 노력을 통해서 결과물을 갈고 닦는게 아니라, 기초 능력치를 끌어 올리고 있는 사람들은 대결이 될 수가 없다. 이미 기본 능력치를 가지고 태어난 이후에 본인이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을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훈련 패턴 등을 이용해 성과를 끌어올리는 데 활용하고 있는 유망주가 전세계에 몇명이나 될까? 본인 나이에서 5년 전후로 계산해보면 그 수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난다. 그런데, 막상 본인은 해당 분야에 유리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지 못해서, 연습하는 그 시간이 능력치를 향상시키는데 활용되고 있다? 전세계, 각 스포츠 종목의 ‘스카우터(해외를 돌아다니며 유망주를 발굴하는 사람)’는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 나이부터, 다른 결과를 보여주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들은 시작점이 다르다. 그 점을 제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결과 = 능력 + 노력 + 운

성장형 사고방식은 위의 수식에서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고정형 사고방식은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운은, 어느 누구도 파악하거나 조작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해결 방법?

그래서 포기하라는 말인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우선, 내가 정말 사랑하고 열정있는 분야에 시간을 쏟아붇고 있는데 능력치가 부족하면

최고는 포기해라. 그리고 만약 최고에 도달하게 되면, 그 때 감사하게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내가 노력하고 있는 분야가 내가 사랑하는 분야는 아닌 경우에는 벗어나라.

내가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야를 찾고, 그 것을 사랑하라

 

 

고정형 사고방식은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묻는다.

과연 나머지 사람들이 ‘노력’이 부족했을까?

성장형 사고방식의 사람들은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묻는다.

과연 정말 ‘능력’에 차이가 있을까?

 

정답은 본인에게 달렸다. 아니, 본인의 사고방식에 달렸다.

참고로, 나는 우승을 놓친 프로 선수에게 “너의 ‘노력’이 부족했다”라는 말은 함부로 못하겠다.

 

logorealfinal

죽은 자와의 대화

desk

나는 글을 제목과 다른 엉뚱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재밌다. 읽는 이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냥 더불어 생각나는 것들이 너무 다양하다보니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할지 고민할 필요 없이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라 그런 것이다.

오늘은 수학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한다. 수학이라는 과목의 내용보다는, 수학의 학습법에 대해서 말이다. 많은 학생들이 수학 과목을 어려워하는 이유가, 개념의 이해에서 그치지 않고, 이해한 그 개념을 마주친 문제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배우는게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수능 시험장에서 마주친 이 문제를, 분명히 내가 배운 것들을 이용해 풀 수 있을텐데, 무엇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익히는 것부터 진짜 수학 공부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 부분과 관련해서 다른 글에서 더 깊이 다루어볼 생각이다.)

문득, 오늘 책을 읽다가 든 생각은 이러했다.

“역사적으로 충분히 검증받은 위인들과 간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독서구나! 특히, 명작으로 손꼽히는 책들을 읽음으로써 작가들, 그 위대한 인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구나!”

이렇게 진부할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했던 이야기이고, 수많은 학생들이 이미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요즘의 멘토, 자기계발서를 찾는 젊은이들의 분위기와 결부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내 또래의 수많은 청년들이 멘토를 찾고, 정답을 위해 헤매며 자기계발서를 들여다보고는 한다. 하지만, 정답은 거기에 있지 않을거라고 본다. 특히, 인류의 공통된 가치관,이념,사고와 관련한 고민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 고민에 대해서는 100년, 500년, 더 나아가, 2000년은 지속되고 연구되고 읽혀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준 ‘고전(Classic)’이 답이지는 않을까? 예를 들면, ‘오만과 편견’, ‘1984’로 시작해서 ‘일리아드/오디세이아’와 플라톤의 저서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특히, 명작일수록 자주 읽어야한다고 한다. 사람은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고를 하게되고, 그 사고의 과정이 시간에 따라 누적되면서, 개인의 가치관이나 관념에 변화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변화된 가치관을 가지고 예전에 읽었던 고전을 다시 펼쳐보면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고 한다. 곱씹어야 진짜 명작인 셈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시작에서 수학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그렇게 곱씹어서 느낀 바를, 말그대로 ‘느끼고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느끼고 배운 바를 현실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에 현명하게 대입하고 대처할 수 있게 되어야 진실되게 명작을 체득한 사람이 아닐까? 나는 이 책도 읽었고, 저 책도 읽었고, 줄거리를 읊고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사람이 현실에 마주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서툴다면 말이다. 그렇게 많은 책을 읽은 이후에, 충분히 성숙하여 마주한 문제를 직시하고, 여유럽게 응시하고, 해결할 여러가지 방안을 너그러이 구상하고, 그 중에 서로에게 가장 좋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평화롭게 해결하려고 설득하고, 그런 과정들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내고,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도 가장 이득이 되는 길로써 점철해 내는 것. 그것이 명작을 통해 강인한 인간으로서 거듭난 결과가 아닐까?

오늘도 참 생각이 많다.

logorealfinal

말하기

desk

Why the majority is always wrong? -Paul Rulkens

모든 고민은 위의 문장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Tedx Talks에서 Paul Rulkens 교수가 강연한 내용의 제목이다. 무려, 3년도 더 지난 이 영상에서 문득 올바른 영어 말하기 학습법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Rulkens교수도 미국 출생이 아니다. (네덜란드 국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LinkedIn 프로필을 보면 영어와 네덜란드어는 원어민 수준, 불어와 독일어는 업무상 소통에는 문제가 없으며 심지어 이태리어도 초급으로 구사한다고 한다. 이런 다국어 활용이 꼭 머리가 좋아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TED 강연에서 그 힌트를 찾았고, 그 내용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물론, 영어를 모국어로 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어와 유사한 문법,어순을 가진 나라에서 태어난 것 만으로도 영어 학습에 큰 이점을 가진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변명거리로 하기에는 우리나라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영어 교육이 너무 훌륭하다. 아래에서 정리할 적합한 학습법을 활용하는 데는 공교육에서 시행하고 있는 영어 교육의 기반으로도 충분하다고 확신한다.

강연에서 실시간으로 말씀하신 내용 중 몇 문장을 먼저 가져와 보겠다. 주목해야할 점은 ‘(V)’로 표시한 중간 길이 이상의 쉬는 부분들이다.(원본 영상 링크)

(1:07 중)In other words, (V) what is got you here(V) will no longer get you there.

 

(1:22 중)Is that always(V) that each of us(V) can do impossible things (V) to truly be great, dramatic results.

 

(1:40 중) ~(생략) why the majority (V) is always wrong, (V) and how you can use that?

영어를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서) 중급 이상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눈치챘을 것이고, 진부한 글이 될 수도 있다. 진심으로 ‘아, 무슨 얘긴지 알겠어’라고 느낀 분들은 아래의 글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아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정도 실력이 되기 위해서 공인 영어 성적을 기준으로 TOEIC 900 전후, 혹은 TOEFL 90 전후가 대부분일텐데, 유치하게 공인 점수를 들이미는 이유는, 본인이 저 점수 달성이 되는데 지금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성의 기준을 마련해주는 것 뿐이다.

만국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주어’와 ‘동사’를 가진다. “내가 간다”라는 문장도 ‘내가’라는 주어 부분과 ‘간다’라는 동사의 부분을 가진다. 그리고 나서 온갖 장치들로 그것들을 확장하고, 활용하고, 꾸며나가는 과정이다.

“내가 슈퍼에 간다”는 문장은 위에서 주어진 기본 문장에 목표 지점을 활용하기 위해서 ‘슈퍼에’라는 부분을 삽입한 것이고, 그렇게 사용하기로 서로 약속해왔다. 그리고 학문적인 연구, 문법적인 대화의 필요로 인해 ‘목적어’라는 장치 이름이 주어졌다.

“내가 어제 들렀던 슈퍼에 간다”는 문장은 내 목표 지점에 대해서 상대가 모르거나, 그냥 내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싶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문장이다. 한국인들은 머릿속에서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이 문장을 생각해내면서, (물론 일부는 생각도 안하고 말을 하는 경향이 있지만) 입 밖으로 말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저 문장을 표현하고 싶을 때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아마 오늘 9시쯤에, 내가 어제 들렀던 그 슈퍼에 간식거리를 사러 갈 거야”. 기본 문장에 비해서 굉장히 확장되고 내용을 많이 내포하는 문장으로 변형되었다. 심지어, 수식 뿐만 아니라 미래에 해당하는 형태로 ‘동사의 변형’까지 수반되었다. 바로 이전 문장이나, 이 문장의 경우에 한국어를 학습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끊어 말하기’가 굉장한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만국의 언어는 ‘주어’와 ‘동사’로 나뉘고, 각각을 수식하는 구나 절이 수반되고, 또는 추가적인 장치들을 이용해 직렬로 문장을 이을 수도 있다. 이른 어마어마한 복잡성을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 말하는 속도에 맞추어 생각해내는 것은 꽤나 오랜 연습 기간이 필요하다. 그 동안에는 적절한 파트 별로 구분하여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내가 (V) 어제 들렀던 슈퍼에(V) 간다”

“아마 오늘 9시쯤에, (V) 내가 어제 들렀던 그 슈퍼에 (V) 간식거리를 사러 갈 거야”

한국어로 예시를 들어주니까, 혹은, 내용이 일상적이니까 매우 유치해보이고 쓸모가 없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그럼 개괄에서 사용했던 예시 문장들을 번역해서 사용해보겠다.

(1:07 중)다시 말해서, (V) 당신을 여기에 당도하게 한 그 방법이 (V) 더 이상 저 곳에도 도달하게 하지는 않는다.

(1:22 중)우리 개개인, 각자가 (V) 불가능한 것 들을 (V) 굉장히 극적인 결과로 이루어내는 것이 (V)항상 가능할까요?(한국어/영어 어순 변화에 따라 맨 앞과, 맨 뒤만 바꾸었음)

(1:40 중) ~(생략) 왜 다수는 (V) 항상 틀리고, (V) 그럼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

구분해서 말씀하신 부분들이 각각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보이는지 모르겠다. 무작정 답답하게 끊어서 얘기하는게 아니라, 문법적인 의미를 갖는 덩어리 별로 생각하시면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인 셈이다.

평소에 한국어로 대화할 때도 이런 부분은 연습하면 좋을 것 같다. 무작정, 빠르고 끊이지 않는 발화가 올바른 말하기 라거나 잘하는 말하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절한 부분에서 적절한 길이의 휴지를 줌으로써 상대가 생각할 시간을 갖게 하고, 서로 오해의 소지를 줄이면서, 내가 어느 부분을 어떻게 수식한 것인지 명확히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래는 유명 인사들의 유사한 예시들을 보여주겠다. 일부는, 모국어가 영어인 사람도 포함하였다. 한국인이 한국어를 말해도 이런 방식으로 연습하는 것이 좋다는 훌륭한 근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One of the biggest challenges we have to our democracy (V) is the degree to which (V) we don’t share (V) a common baseline of facts. -Barack Obama, David Letterman Show 중 14:22

 

So, I’m of two minds there. (V) I think one reason open source works so well in code (V) is that (V) at the end of the day, (V) code tends to be somewhat black and white. (V) There’s often (V) a fairly good way (V) to decide.(생략)~ – Linus Torvalds, Ted Talks 중 19:55

 

~(생략)and I’m hopeful (V) the new administration will do the same (V) they’re new (V) it’s a chance to have them go out (V) to Africa see what’s going on (V) in our system the Congress (V) it has the final say on the budget and (V) a lot of them and have been over(생략)~- Bill Gates, Interview on AI,Trump,Fake News 중 5:51

logorealfinal

 

겸손

desk

I know that I’m intelligent, because I know that I know Nothing.

– Socrates

모든 인용문, 특히 죽은지 시간이 오래 흐른 유명 인사의 인용에는 일정한 비판이 따른다. 그 사람이 과연 그 말을 했을까? 혹은, 우리가 그 의미에 대해서 오해하고는 있지 않은가? 후자에 대한 의문, 즉, 구문의 해석에 대해서는 석학들이 우리를 대신해 연구해왔고, 전자의 의문에 대해서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다. 개인적으로는, 그 사람이 그렇게 말을 했다고 전해지는 ‘이유’에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위 인용문은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가장 현명한 사람이다”라는 문장이다. 소크라테스가 저런 말을 했다고 전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현자로 일컬어지는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기에, 내가 진정 ‘안다’라고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는지 의문스러웠고, 결국 내가 진정으로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이 것을 깨닫는 것이 참된 앎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웹 상에서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통설이고 어디서부터는 아직도 가설에 불과한지가 명확하게 자리잡지 않은 사람들. 혹은 자신이 그 분야에 대해서 일부를 안다고 마치 모든 것을 궤뚫어 보는 양 떠드는 사람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들은 그런 식으로 떠들어 댐으로써 오히려 본인이 아는게 적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까?

겸손해야 한다. 무작정 겸손한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아직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는게 중요하다. 어느 순간, 충분히 깊이 파고 들어가다 보면, 내가 아직은 부족할 ‘수도 있겠다’라는 느낌을 받을 것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다 보면 ‘역시’ 나는 아직 부족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Print

학문의 길에서 개인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를 가장 잘 표현했다고 느끼는 자료,원문:링크

학문의 길을 걷는 인간을 가정할 때, 기본적으로 (유치원)초등학교, 중학교의 정규 교육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학문의 길을 걸을 인간의 교육 과정은 거의 유사하다. 여기까지 차이가 존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가장 큰 갈래는 고등학교 진학부터 시작된다. 인문계열과 이공계열, 상공계열, 공과계열로 나뉘어 자신의 분야에서 사용될 기본 지식을 쌓기 위해 나아간다. 각 계열에서 이룬 성적을 통해 계열에 해당하는 대학 학부에 진학하게되고, 그곳에서 인류 지식의 매우 작은 일부분을 습득하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자신의 지식에 대한 충분한 성찰이 뒷받침되지 않았던 개인은 심각한 오류에 빠져드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속한 분야의 학부에서 쌓은 지식만으로 내가 인류의 지식 중 꽤나 많은 부분을 습득한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우물 안 개구리의 상황과 유사하다. 본인이 아는 것이 그 분야밖에 없고, 관심 있는 분야도 그것 하나이다보니 시야가 좁다.) 깊이와 넓이 모두에서 틀린 생각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큰데, 깊이 측면에서는 본인의 분야에서도 아직 더 공부해야 할 분량이 많이 남아있다는 의미이고, 넓이 측면에서는 본인이 전공하지 않은, 심지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무수히 많은 분야에서 무수히 많은 개인이 인류의 지식 발전을 위해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수동적’ 겸손?

학문의 길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학문의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쉬운 예를 들어보겠다.(물론, 이 예를 통해 오히려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글에서 얘기하는 ‘겸손’을 득하지 못한 인간은 이어서 나올 예를 보자마자 달려들어 비난하고 나설 가능성이 커보인다.) 형이나 아버지에게 CPU라는 것에 대해 들은 초등학생 1학년 김 군은 친구들에게 가서 ‘너희는 CPU가 무엇인지 아느냐?’라며 자랑하듯 떠들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중학생 이 군은 속으로 ‘겨우 CPU를 알았다고 아는 체를 하다니, 우습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생인 형에게 ‘오늘 길을 걷다가 CPU를 안다고 친구들을 무시하는 초등학생을 보았다. AMD,INTEL은 알지모르겠다’며 카톡을 보내지 않을까? 컴퓨터를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 박 군은 컴파일러, 운영 체제 수업 시험을 준비하느라 지쳐있다가 이 카톡을 보고 또 다시 비웃는다. ‘너가 비웃는 초등학생이 내가 보는 너의 모습이다’며 말이다. 이런 진행은 그 어떤 분야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누가 어떤 사람일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냥 가만히 있자. 물론, 이것은 매우 수동적인 ‘겸손’에 해당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좋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도 좋다. 수동적 ‘겸손’으로 비롯되어 나중에는 진실된 겸손을 깨우치는 순간이 온다. 누가 어떤 사람일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아는게 없다. 진짜 안다고 할 수 있는게 뭔지 모르겠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도 사실 모르는게 있었다.

‘안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안다’는 것과 ‘들어보았다’ 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회화에서 우리가 ‘안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사실은 ‘들어보았다’를 의미할 때가 많다.(A:”칸트에 대해서 아니?”, B:”응, 알아'”/B가 철학 학사 전공에, 칸트 전공이라 알까? 아니면 그냥 칸트라는 인물에 대해 들어보았던걸까?) 논쟁으로 발전할 경우 이 차이가 심각하게 작용하는데, 다른 사람과 내가 모두 ‘안다’면 공유해야할 배경지식을 사실은 어느 한 쪽이 가지고 있지 않아서 결론 도출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그런 상황이다. 여기서부터는 더욱 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안다’라는 단어를 재규정할 사회적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안다’라는 단어는 내가 그것과 관련하여 일정 시간 이상 읽고, 공부했거나, 그것과 관련한 전공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아는 것’이 아닐까?(*알다라는 단어가 원래 그런 의미로 쓰인다고 주장하는 독자가 있을 염려에 덧붙인다. [출처:국어사전] 알다 : 1. 교육이나 경험, 사고 행위를 통하여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갖추다, 2. 어떤 사실이나 존재, 상태에 대해 의식이나 감각으로 깨닫거나 느끼다. 등, 심지어 유의어로 등장하는 단어들은 더욱 심오하다. 1. 기억하다, 2. 깨우치다, 3. 납득하다)

자신감 vs 겸손함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라고 물을 시점이 되었다. 결론은, 겸손하자는 말이다. 다만, ‘겸손함을 전면에 드러내며 사는건 자신감의 결여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자신감과 겸손함은 병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겸손하다는 것이 그 사람은 자신감이 부족해라는 말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자신감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겸손하자는 말이다.

logorealfinal

 

퇴고

desk

한낱 개인 블로그에 글을 작성할 때에도 누가 와서 볼지, 어떤 비판을 받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면서 한치의 오해 없이 내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 수 차례 처음부터 찬찬히 다시 읽으며 수정을 한다. 감히 비교하기에도 벅차지만, 문학에서의 퇴고에 해당하는 과정일 것이다. 내 머리속에 떠도는 여러 생각이 글의 형태로서도 읽는이에게 오해가 없이 전달될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새로이 느끼는 과정에 있다.

학창 시절부터, 군 시절까지 소위 ‘필력’은 뛰어나다고 자부해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든, 혹은 주제가 모호하든 관계 없이 주어진 환경 아래에서 최적의 결과물을 적어내곤 했다.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블로그에 게제하는 글에는 제한 시간도 주제의 모호성도 없다. 본인이 주제를 정할 뿐만 아니라, 내가 쓰는 글을 퇴고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는 셈이다. 따라서, 작성되어 세상의 빛을 본 내 글이 수준 이하일 경우, 비난은 모두 내가 감수하는 것이다.

발표문이나 낭독문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발표/낭독되고 난 후에는 폐기되기 마련이다. 그 것이 역사적이거나 큰 의미를 갖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블로그의 글은 그것과도 사뭇 다르다. 내가 블로그를 폐지하지 않는 이상은 적절한 검색어 혹은 링크를 기억하는 경우, 그 주소를 입력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내 글을 다시 확인하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건적 영구성을 지닌다.

지금까지 나는 꽤 많은 글을 읽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것이 철학서 이든지, 법학 기본서이든지, 컴퓨터 서적이든지, 혹은 웹사이트상 글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직접 주기적으로 중/장편의 글을 작성하려고 하니 내가 읽은 양이 오히려 아직도 적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농부가 여러 작물의 씨앗은 구분할 줄 알면서도, 정작 수확할 때의 실수가 잦은 느낌이랄까. 문장의 마무리라든지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접속어 등을 더 다듬을 수 있어야 겠다.

사실은, 블로그에 게제하지 않고 저장해둔 쓰다만 글들이 여러편 있다. 어느 때고 그 주제에 대해서 생각이 추가되거나 할 때 돌아와서 편집하고는 한다. 이제는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막상 업로드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는 한다.

logorealfi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