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모삼천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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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제목을 내가 하려는 얘기와 동떨이지게 달아보았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동떨어진 것은 아니고 가만히 생각하다보니 여기까지 이르렀다.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 :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에게 훌륭한 교육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세 번 이사한 일. 처음에 묘지 근처에 살았더니 맹자가 장사(葬事) 지내는 흉내를 내므로 시전(市廛) 가까이로 이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물건을 사서 파는 흉내를 내므로 다시 서당(書堂) 가까이로 이사를 했더니 예의범절을 흉내 내므로 그 곳에 거처를 정했다고 함. 교육에는 환경적 요인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음

최근에, 일하는 곳에서 인력이 더 필요해 구인을 하고 있다. 구인 공고를 내자마자 굉장히 많은 이력서가 날아들었고, 검토를 도우면서 느낀 것이 참 훌륭한 인재가 많다는 것이었다. 나도 아직 한참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는, 학자금과 관련해 장학금 및 대출 제도에 대해서 문의하느라 방문한 곳이 있었다. 그 곳에는 정말 형편이 안 좋은 학생들이 많았다. 나는 참 행복한거구나 하고 느꼈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놓고 보니 또 재밌는 생각이 났다. 맹모삼천지교였다.

사실, 그렇게 잘난 사람이 많거나, 모두가 그렇게 생활 형편이 힘들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상황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유사한 상황에 놓인 사람만 보일 거라는 점이다. PC방만 들락거리면 모두가 게임만 하고 사는것처럼 착각할 것이고, 학교 도서관만 들락거리면 모두가 매일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보일 거라는 말이다.

아니다. 결국 타인은 한 개인을 끊임없이 추적, 관찰할 수 없다. 전체를 보는 것 뿐이다. 어제 본 도서관의 100명 중에서 오늘 보고 있는 100명중에 몇 명이나 동일인일까? 관광지는 같은 측면에서 더욱 심각하다. 라스베가스의 도박장에서 오늘 본 1000명 중에서 몇 명이나 어제도 이곳에 있던 사람일까? 자칫 본인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모두가 그런 환경에 처해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뜻이다.

결국, 내가 보는 관점에 매몰될 가능성이 있다면, 즉, 환경에 휩쓸릴 가능성이 있다면 환경 자체를 나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것이 좋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You are the average of  the five people, you spend the most time with” – Jim Rohn

“당신은 당신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5명의 평균이다”

유명한 위의 인용구와도 일맥상통하는 바이다. 결국은, 내가 향하고자 하는 목표에 어울리는 환경과 주변 인맥에 휩쓸려 있어야 그 곳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누구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지, 혹은, 게임 등에 빠져있느라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이가 아예 없지는 않은지 고민해볼 좋은 시점일 것이다.

logorealfinal

기회, 목표, 성공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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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처음에는 기회의 측면에 대해서 적기 시작했는데, 수정하고 수정하다보니, 목표를 잡는 방법, 그리고 두 가지 대비되는 사고방식(고정형과 성장형)에 대한 이야기까지 추가되어 매우 방대해졌다. 그로 인해 본의 아니게, 서문을 추가하고, 형식을 바꾸다보니 게시 시점이 더욱 늦어지게 되었다. 다만, 여러차례 다시 읽고, 수정을 거듭한 끝에 오랜 시간 고민해 왔던 문제에 대해서 잘 다듬어진 글이 탄생한 것 같아 기쁘다. 가까운 지인들은 알겠지만, 여기에 적힐 내용에 대해서 굉장히 오랜 시간 고민을 해왔다. 고민하기를 수 년에, 글로 옮겨 놓고 수정을 2달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결론을 내렸고, 포장을 하여 여러분께 선보인다. 내용이 예민한만큼 부디, 오해 없이 전달되기를 바랄 뿐이다.

 

기회에 대하여

 

1.내가 주는 기회

지금

누구를 만나든지 섣불리 판단하지 마라. 현재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최소한 대화해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가 없다.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은 단순한 대화 뿐만 아니라 꽤나 긴 시간 곁에서 겪어본 이후에 진실된 모습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부는 그 과정을 겪으면서도 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누군가를 판단하지 마라.

#예. 지인 중 한 명은 집안 형편이 좋은 편에 속한다. 다만, 어린 나이부터 유복한 집안 환경을 보고 접근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보니, 겉으로는 오히려 부족해 보이게 하고 다닌다. 함께 다니다보면, 드러내놓고 이 친구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참 재밌는 노릇이다. 과연, 그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걸까? 그들은 이 친구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모르지 않는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그렇게도 중요하다는 말인가?

후에

지금 마주친 사람이 당장에 나와 관계 없고,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이 없을지 몰라도, 그 사람이 나중에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변해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감히 누군가의 미래를 평가하려고 하지 말자.

#예. 일전에 2시간 거리의 면접 장소에서 면접 시작 5분만에 탈락한 적이 있었다. 면접 시작과 동시에 어떤 기술에 대해서 익숙하냐고 묻더니, 모른다고 답하자 너는 이 기술을 모르니 너를 뽑을 생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다시 읽어본 채용 공고 어디에도 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라는 내용은 없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깔끔했다. 다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 재미있었다. 내가 이 업무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추가로 공부하고 연구할 생각인지, 혹은 나는 어떤 태도를 가진 사람인지, 지금 당장 그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하게 된 이유라도 있는건지, 있다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전혀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너는 이 기술이 없으니 가라. 깔끔했다. 당연히, 그 일이 있은 후 몇 주에 걸쳐, 이 분야에서 일을 하려면 필요하겠다는 판단하에 그 기술을 공부하고 습득하였다.

위는 모두 내가 다른 사람에게 부여할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다. 당신도 누군가에게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다만, 사회의 누구도 위의 것들을 기회 제공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뿐이다. 능동적인 기회만이 기회가 아니다. 내가 여유가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투자할 수 있고, 채용해줄 수 있는 것만이 기회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수동적 기회 제공이 있다. 내가 저 사람에 대해서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유보해둠으로써 그가 원하던 것을 이루어낼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기회. 그것도 당신이 타인에게 제공할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기회인 셈이다.

 

2.나에게 주어진 기회

예전부터

지금의 당신은 당신이 투자한 시간의 총합이다. 당신에게는 항상 기회가 있었다. 제발, 세상을 탓하지 마라. 남을 탓하지 말고, 환경을 탓하지 마라. 현재 “(당신의 나이-7) X 365 X 24” 를 계산해보면 당신이 충분히 학습이 가능해졌다고 가정할만한 나이인 8세(혹은 그 이전) 부터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을 알 수 있다. 그만큼의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들을 투자하여 현재의 당신이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탓하지마라. 기회는 항상 당신 앞에 놓여있었다.

환경 탓에 대해서 조금 더 적어보고 싶은데(‘기회’라는 주제에는 벗어난 측면도 있어 보인다만), 죽지 않고 살아서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이 글을 읽는 시간에 본인이 해야 하는 일을 하자. (심지어 본인이 사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모르고 있다고? 가슴 깊숙이 들여다 보아라. 심장의 소리를 들어보면 내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하는지 다 안다.)세상에는 무조건 지금 본인보다 더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개인이 존재한다. 무조건 아래를 기준으로 삼고, 너는 행복하다 라고 판단해야 한다는 세간의 말에 나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중잣대를 나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중잣대를 엉뚱하게 민생,경제,치안,안보와 관련한 토론 때에나 사용하고 정작 자기 발전을 이용해서는 사용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위에서 언급한 토론 등에서는 이중잣대를 엄격히 배척하고, 엄정하고 논리적으로 토론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생활함에 있어서는 이중잣대를 현명하게 활용할 줄 아는 것도 좋아보인다는 말이다. 내가 힘들다고 생각하거나, 너무 고생하고 있다, 혹은 내가 처한 환경이 나에게 도움이 안된다 등의 진부한 남탓을 시작할 때에는 잣대를 아래에 맞출 필요가 있다. 무조건 나보다 힘든 사람은 있다. 나는 행복한 편이다. 기준을 해외로 넓힐 수록 더욱 그렇다. 다만, 정신을 차리고, 동기 부여가 완료된 상황에서 목표를 정할 때에는 그 목표를 높게 잡아야 할 것이다. 잣대가 위로 맞춰질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혹은 관심 있는 분야에서 최대치에 있는 사람에게 기준을 맞추고, 저 사람 만큼 혹은 더 크게 성공할 것이다 라고 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도

간혹, 나에게 공부 방법을 묻는 친구들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질문 방식에 대표적으로 두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영어 공부 어떻게 하면돼?”

이런 질문을 하는 부류를 수도 없이 만나왔고, 꽤 많은 사람들은 그 학습을 지속하지 못하고 있는 결과를 보았다. 심지어 이런 유형의 질문은 본인이 진심으로 학습을 원하는 경우, 몇 분의 투자만을 하더라도 온라인에 수도 없이 많은 양의 정보와 자원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더욱 의미가 없다.

“내가 영어 공부를 해보려고 했는데, 이 부분을 모르겠는데 무슨 뜻이야?”

“내가 영어 서적을 찾아봤는데, A,B,C 이런 책들을 추천하던데 너는 어떤 책이 좋다고 생각해?”

개인적으로, 아주 도와주고 싶게 만드는 질문이다. 본인이 어떤 학습을 하고 싶어서 덤볐으나 막히는 부분이 이러하니 이 것을 도와주길 바란다는 형태의 질문은 본인이 가능한 선에서 충분히 노력해봤고, 그럼에도 막히는 것이 있다는 의미가 되므로 도와주는데 거리낌이 없도록 해준다. 추가적으로, 어떤 것들을 찾아 봤고, 어디에서 찾아 봤고, 그 결과가 어떠했다는 것이 추가될수록 본인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으므로, 대답하는 사람에게 추가적인 정보가 된다.

후자의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자. 지금 어떤 것이 필요하거나, 앞으로 그 것을 필요로 할 것 같으면, 열심히 찾아보고 공부하고 읽어라. 무작정 누군가가 나타나서 혹은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져서 그것을 해결해줄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그것은 오히려 그 상대에게 나의 무책임함과 나태함을 드러내며, 민폐를 끼치는 일일 수 있다. (추가 : 질문을 활용하는 방법)

 

 

 

목표에 대하여

먼 미래부터

최종적으로 원하는 바를 설정하고, 그 것을 이루기 위한 전단계들을 통해 서서히 중/단기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중/단기 목표들을 각각 달성하기 위해서는 현재 내가 시간과 비용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해야하는지 윤곽이 잡히게 마련이다.

30분 후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똑똑하도록 살아라

(웹상에서 이런 구절을 본 적이 있는데, 찾으려고 하니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의 시간을 잘 활용하여 30분 후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알고, 현명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 시간들이 모두 누적되었을 때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목표는 높게 잡아라

무조건 목표는 높게 잡아라. 나는 애매한 목표를 잡은 후에 성취하는 것보다, 높은 목표를 잡은 후에 실패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부류에 속한다. 30의 목표를 잡은 후에 성공하는 것보다는, 500의 목표를 잡고 실패했지만 230이라도 이룬 것이 낫지 않을까?

허무 맹랑한 목표를 잡지마라

황당할 것이다. 목표를 높게 잡되, 허무 맹랑한 목표를 잡지 말라니.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높은 목표이지만, 세분화해서 현실화가 가능한 것들로부터 쌓아 올라갈 수 있는 목표를 잡으라는 말이다. 모든 일은 idea로부터 시작된다. 그 아이디어는 정밀화 되기 전까지 매우 투박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잘게 쪼개고, 쪼개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지금부터 준비할 수 있거나 실행할 수 있는 규모로 작아질 것이다. 그 것들부터 다시 시작해서 위로 하나씩 조립해 나가는 것이다. SpaceX, Tesla. 이루어온 것들을 천천히 되짚어보면 모두 비슷했다. 우주 산업과 전기 자동차 분야를 도전하겠다는 idea에서 시작해서 그것들을 다시 아래로 끌고 내려온 이후에 지금 가능한 것부터 거꾸로 성취하며 조립해 올라갔더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허무 맹랑한 목표를 잡아라

… . 시간은 흐른다. 내가 지금 아무리 잘게 쪼개보아도 더 이상 현실적으로 가능한 조각들로 쪼개지지 않는 idea라고 하더라도, 가슴 한켠에 항상 품고 있어라. 50년, 60년, 심지어 70년이 지나고 나서 인류가 어느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을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진공관 수천개를 연결하여 컴퓨팅을 하던 시절이 불과 60년 전이다. 지금은 나노미터의 공정을 활용하여 CPU를 제작하고 있다. 반 세기 전, 현대의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 동시 작업 제조 공정을 상상하던 젊은이가, 도저히 현실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꿈을 포기했다면 현대의 노인이 되어 얼마나 많은 한을 품게 될까.

 

 

 

근데, 너는 안된다.

 

내가 주변 친구,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있다. “그래도 너는 안된다.”. 아마 아주 가까운 친구들은 위 인용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내가 무슨 얘기하는지 알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얘기를 듣기 귀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나는 저 문구에 굉장히 매료되어있으므로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그래도 너는 안된다”라고 해준다. 너는 안된다. 이 말을 듣고 불쾌하거나 분노해서 열심히(지금까지 열심히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하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래도 안된다. 본인이 살아왔던 삶에는 관성이 존재한다. 동기부여 영상들 아무리 많이 봐도 안된다. 유투브에 소중한 영상 하나가 업로드 되어 있는데 바로 메가스터디 손주은 대표가 재수생 오리엔테이션 수업에서 한 말이다. “너희들 지금 막 불타오르고 그러지? 오리엔테이션 끝나고 문닫고 나가면서 까먹어! 까먹는다니까? 이거 ** 지금 막 불타오르고 그래도 1시간도 안가. 기억해.”  안된다. 이렇게 안된다고 하면, 정말 분노하는 시점이 온다. 다들 그랬다. 내 앞에서 얼굴 붉어지고 본인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본인은 아니라고 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지금 정말 변화했다고 인정할 만한 사람은 아직 단 한 명도 없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될 것이다. 이 얘기를 정확히 인지하고, 그래 내가 그 첫 번째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하면 변화할 수 있다. 그러면 된다. 그게 필요해서 자꾸 저 얘기를 하는 것이다. 진정한 변화는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던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거꾸로 얘기하면 내가 죽을만큼 절박하거나 그 변화가 필요하지 않은데 말로만 ‘난 달라질 것이다 ‘라고 읊어봐야 전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정말 바뀌어야 한다. 변화해야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래도 안 된다. 자 이제 다시 이 문단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된다. (이것이 재귀함수다.)

바로, 당신이 ‘감히 누군가의 미래를 평가하려고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맞다. 내가 그런 말을 적어두었다. 게다가, 이 글에서 말이다.

앞뒤가 다른 것 아닌가?

아니다. 저 말은 그 사람을 모를 때에 대해서 한 말이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어떤 사람인지도 모를 상태에서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거나, 혹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핵심으로 작용하는 태도(근면,성실함 등)가 충분히 결격되어 있을 때에는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이전에, 실패한 사업에서 개발팀에 속하는 인원중 한 명이 본인은 수면이 무조건 12시간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도 좋다. 문제는, 깨어있는 12시간 중에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점이다. 도대체 무슨 개발을 하겠다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다. 변화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그 사람은 안된다.

 

 

능력 VS 노력

고정형? 성장형?

평소에 도움이 필요하거나 조언이 필요할 때 자주 찾는 듬직한 동생이 한 명 있다. 그 친구는 (흔히 말하는) ‘계몽주의자’다. 모두는 변화할 수 있고, 계기가 있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한다. 간혹, 얘기가 진지해질 때면, 심각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나는 확실히 ‘계몽주의자’는 아니다. ‘GRIT’이라는 책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정형 사고방식과 대비되는 유형으로 성장형 사고방식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책에서는 고정형 사고방식은 인간의 지적 능력 뿐만 아니라 성취할 수 있는 한계점이 고정되어 있고, 선천적이라 본인의 노력 여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성장형 사고방식은 내가 노력하기에 따라 그 한계점은 변화할 수 있는 것이므로, 항상 무언가 잘못되거나 성취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에는 자기 성찰을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런 차이점으로 인하여 고정형 사고방식은 피해야 할 것, 성장형 사고방식은 적합하고 추구해야 할 것으로 소개해두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나는 양쪽이 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능력에는 확실히 차이가 존재하고, 그 차이를 극대화 시키는 것은 노력이 맞지만, 대부분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 언저리에 머무는 사람들은 다 본인이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의 최대한을 이용하여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산출물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은 능력을 이용하지 않고는 해석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그 능력은 사람마도 다 다르게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쉽게 얘기하면, 각 분야에서 100까지의 성과가 가능하다고 할 때, 예를 들어, 95이상의 성과는 그 분야에 대한 능력이 월등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이 단순히 노력만으로 성취할 수는 없는 성과라는 말이다. 그리고, 95이상의 성과를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략 80 이상 수준의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가정할 때, 81,82,…99의 능력을 가진 야망있는 모든 유망주들은 하루의 시간을 최대한 투자하여 노력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운이 가미되면서, 산출물이 등장한다. 특정 분야에 대해서 65 정도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 95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과 경쟁해서 승리를 거두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더 노력해야 하고,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95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그 유망주도, 본인이 그 분야에 매료되고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과 노력에 투자할 것이다. 둘이 가진 시간은 물리적으로 24시간으로 동일하다. 둘이 연습한 시간의 차이가 존재해야 그나마, 능력의 차이를 메꾸어 나갈 수 있는데, 그것 자체가 힘들다는 말이다. 결국, 95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해당 분야에서 95이상의 성과를 도출해낼 수 있지 않을까?

우선, 인용을 조금 해보겠다.

고정형 사고방식은 자신의 존재를 한정짓는다. 성공을 했을 때는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실패를 경험하면 자신의 존재에 결함이 있다고 느끼고 결국 자아의 위협을 느끼며 정체성의 위기가 오게 된다. 실패의 순간에는 뇌의 활동이 자기 자신에게 매몰되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배우는 데 활용되지 못하며,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게 되어 새로운 전략을 과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성장형 사고방식은 자신을 한계짓지 않고 실패를 더 큰 자아로 성장하기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이 아이들은 역경을 맞아도 정체성의 위기를 겪지 않으며, 자기가 성장하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장애물로 생각한다. 그래서 도전을 주저하지 않고, 피드백을 발판으로 새로운 전략을 과감히 구사한다. 결국 성장형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성공한 사람들의 예를 들어서, 그들이 대부분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윤리학적,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큰 자극을 줄 수 있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꽤나 오랜 시간에 걸친, 그리고 양적으로도 풍부한 연구 결과들을 내포하고 있고, 근거도 충분해 보인다. 다만, 내가 저런 논의 자체를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는 그 시작점에 있다.

최고를 바라고 꿈꿔왔던, 그리고 그 자리를 위해 노력했던, 즉 최고의 자리에 이르지 못 한 수 많은 사람들은 정작, ‘고정형 사고방식이 맞을 수 있겠다’ 라는 의구심을 품고는 했다라는 점이다. 고정형 사고방식의 개요를 확장하면, 개인의 지적 능력이나 특정 분야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능력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성장형 사고방식의 잣대를 그대로 들이밀면, 챔피언스 리그에서 활약하는 4강에 오를 수 있는 팀들의 선수 개개인과, 그 바로 아래인 4강에서 16강에 해당하는 팀들에 속해있는 선수들의 ‘노력’이 부족하다. 그들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고, 그래서 결과가 모자란 것이다.

아! 팀스포츠라서 다를까? 개인 스포츠를 예로 들어보겠다. 전세계의 온갖 개인 종목 프로 스포츠의 1,2위와 나머지 그 아래의 모두는 ‘노력’에 차이가 있었다. 선천적으로 동일했지만, 나머지는 ‘노력’이 부족했다. 성장할 수 있는데, ‘노력’이 부족해서 그 성적에 그쳤다.

아니다

일반 대중이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성장형 사고방식은 매우 적합하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내에게 할당된 업무를 수행하고, 월급을 받고나서 가정을 꾸리는데에 있어서, 성장형 사고방식은 매우 유리하다. 내가 노력하면, 더 높은 직책에 도달할 수 있고, 내가 근면하면 운동할 시간을 마련할 수 있고, 운동을 통해서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고, 부지런하면 주말에 조금 일찍 일어나서 독서를 한 후에 가족과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다.

거기까지가 끝이다

성장형 사고방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끝없이 향상시키던 사람들은 그 한계점에 부딪히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대결이 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유전자, 능력 자체가 다르다.

심지어는 나보다 월등한 (제발, 부탁이다. 정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여기서 얘기하려는 ‘월등한’은 유전적 우월주의나 인종차별이 절대 아니다. A와 B라는 축구 선수에게 축구에 필요한 유전자의 차이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한 쪽이 축구 유전자에서 앞선다고 유전자 전체가 앞선다는 의미가 아니다.) 능력의 유전자를 가진 그 사람도 내가 한 것만큼 혹은 그 이상의 노력을 한다. 그게 문제다. 나만 노력하는게 아니라, 모두가 최대의 노력을 하는데 결과 산출물이 다르다. 거기서 고정적 능력치를 대입하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성공한 사람들을 조사해보니 성장형 사고방식이더라, 에서 그치면 안된다. 그것은 기만과 다를 바가 없다. 최소한, 양심이 있다면, 그 뒷 이야기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능력이 월등했는데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진 것 뿐이다.

최고를 꿈꾸는 사람들에 한해서, 모두가 노력하고 있는 현 시점에, 노력을 통해서 결과물을 갈고 닦는게 아니라, 기초 능력치를 끌어 올리고 있는 사람들은 대결이 될 수가 없다. 이미 기본 능력치를 가지고 태어난 이후에 본인이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을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훈련 패턴 등을 이용해 성과를 끌어올리는 데 활용하고 있는 유망주가 전세계에 몇명이나 될까? 본인 나이에서 5년 전후로 계산해보면 그 수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난다. 그런데, 막상 본인은 해당 분야에 유리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지 못해서, 연습하는 그 시간이 능력치를 향상시키는데 활용되고 있다? 전세계, 각 스포츠 종목의 ‘스카우터(해외를 돌아다니며 유망주를 발굴하는 사람)’는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 나이부터, 다른 결과를 보여주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들은 시작점이 다르다. 그 점을 제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결과 = 능력 + 노력 + 운

성장형 사고방식은 위의 수식에서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고정형 사고방식은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운은, 어느 누구도 파악하거나 조작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해결 방법?

그래서 포기하라는 말인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우선, 내가 정말 사랑하고 열정있는 분야에 시간을 쏟아붇고 있는데 능력치가 부족하면

최고는 포기해라. 그리고 만약 최고에 도달하게 되면, 그 때 감사하게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내가 노력하고 있는 분야가 내가 사랑하는 분야는 아닌 경우에는 벗어나라.

내가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야를 찾고, 그 것을 사랑하라

 

 

고정형 사고방식은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묻는다.

과연 나머지 사람들이 ‘노력’이 부족했을까?

성장형 사고방식의 사람들은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묻는다.

과연 정말 ‘능력’에 차이가 있을까?

 

정답은 본인에게 달렸다. 아니, 본인의 사고방식에 달렸다.

참고로, 나는 우승을 놓친 프로 선수에게 “너의 ‘노력’이 부족했다”라는 말은 함부로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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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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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제목과 다른 엉뚱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재밌다. 읽는 이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냥 더불어 생각나는 것들이 너무 다양하다보니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할지 고민할 필요 없이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라 그런 것이다.

오늘은 수학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한다. 수학이라는 과목의 내용보다는, 수학의 학습법에 대해서 말이다. 많은 학생들이 수학 과목을 어려워하는 이유가, 개념의 이해에서 그치지 않고, 이해한 그 개념을 마주친 문제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배우는게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수능 시험장에서 마주친 이 문제를, 분명히 내가 배운 것들을 이용해 풀 수 있을텐데, 무엇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익히는 것부터 진짜 수학 공부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 부분과 관련해서 다른 글에서 더 깊이 다루어볼 생각이다.)

문득, 오늘 책을 읽다가 든 생각은 이러했다.

“역사적으로 충분히 검증받은 위인들과 간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독서구나! 특히, 명작으로 손꼽히는 책들을 읽음으로써 작가들, 그 위대한 인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구나!”

이렇게 진부할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했던 이야기이고, 수많은 학생들이 이미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요즘의 멘토, 자기계발서를 찾는 젊은이들의 분위기와 결부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내 또래의 수많은 청년들이 멘토를 찾고, 정답을 위해 헤매며 자기계발서를 들여다보고는 한다. 하지만, 정답은 거기에 있지 않을거라고 본다. 특히, 인류의 공통된 가치관,이념,사고와 관련한 고민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 고민에 대해서는 100년, 500년, 더 나아가, 2000년은 지속되고 연구되고 읽혀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준 ‘고전(Classic)’이 답이지는 않을까? 예를 들면, ‘오만과 편견’, ‘1984’로 시작해서 ‘일리아드/오디세이아’와 플라톤의 저서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특히, 명작일수록 자주 읽어야한다고 한다. 사람은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고를 하게되고, 그 사고의 과정이 시간에 따라 누적되면서, 개인의 가치관이나 관념에 변화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변화된 가치관을 가지고 예전에 읽었던 고전을 다시 펼쳐보면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고 한다. 곱씹어야 진짜 명작인 셈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시작에서 수학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그렇게 곱씹어서 느낀 바를, 말그대로 ‘느끼고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느끼고 배운 바를 현실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에 현명하게 대입하고 대처할 수 있게 되어야 진실되게 명작을 체득한 사람이 아닐까? 나는 이 책도 읽었고, 저 책도 읽었고, 줄거리를 읊고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사람이 현실에 마주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서툴다면 말이다. 그렇게 많은 책을 읽은 이후에, 충분히 성숙하여 마주한 문제를 직시하고, 여유럽게 응시하고, 해결할 여러가지 방안을 너그러이 구상하고, 그 중에 서로에게 가장 좋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평화롭게 해결하려고 설득하고, 그런 과정들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내고,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도 가장 이득이 되는 길로써 점철해 내는 것. 그것이 명작을 통해 강인한 인간으로서 거듭난 결과가 아닐까?

오늘도 참 생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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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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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know that I’m intelligent, because I know that I know Nothing.

– Socrates

모든 인용문, 특히 죽은지 시간이 오래 흐른 유명 인사의 인용에는 일정한 비판이 따른다. 그 사람이 과연 그 말을 했을까? 혹은, 우리가 그 의미에 대해서 오해하고는 있지 않은가? 후자에 대한 의문, 즉, 구문의 해석에 대해서는 석학들이 우리를 대신해 연구해왔고, 전자의 의문에 대해서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다. 개인적으로는, 그 사람이 그렇게 말을 했다고 전해지는 ‘이유’에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위 인용문은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가장 현명한 사람이다”라는 문장이다. 소크라테스가 저런 말을 했다고 전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현자로 일컬어지는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기에, 내가 진정 ‘안다’라고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는지 의문스러웠고, 결국 내가 진정으로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이 것을 깨닫는 것이 참된 앎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웹 상에서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통설이고 어디서부터는 아직도 가설에 불과한지가 명확하게 자리잡지 않은 사람들. 혹은 자신이 그 분야에 대해서 일부를 안다고 마치 모든 것을 궤뚫어 보는 양 떠드는 사람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들은 그런 식으로 떠들어 댐으로써 오히려 본인이 아는게 적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까?

겸손해야 한다. 무작정 겸손한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아직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는게 중요하다. 어느 순간, 충분히 깊이 파고 들어가다 보면, 내가 아직은 부족할 ‘수도 있겠다’라는 느낌을 받을 것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다 보면 ‘역시’ 나는 아직 부족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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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길에서 개인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를 가장 잘 표현했다고 느끼는 자료,원문:링크

학문의 길을 걷는 인간을 가정할 때, 기본적으로 (유치원)초등학교, 중학교의 정규 교육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학문의 길을 걸을 인간의 교육 과정은 거의 유사하다. 여기까지 차이가 존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가장 큰 갈래는 고등학교 진학부터 시작된다. 인문계열과 이공계열, 상공계열, 공과계열로 나뉘어 자신의 분야에서 사용될 기본 지식을 쌓기 위해 나아간다. 각 계열에서 이룬 성적을 통해 계열에 해당하는 대학 학부에 진학하게되고, 그곳에서 인류 지식의 매우 작은 일부분을 습득하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자신의 지식에 대한 충분한 성찰이 뒷받침되지 않았던 개인은 심각한 오류에 빠져드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속한 분야의 학부에서 쌓은 지식만으로 내가 인류의 지식 중 꽤나 많은 부분을 습득한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우물 안 개구리의 상황과 유사하다. 본인이 아는 것이 그 분야밖에 없고, 관심 있는 분야도 그것 하나이다보니 시야가 좁다.) 깊이와 넓이 모두에서 틀린 생각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큰데, 깊이 측면에서는 본인의 분야에서도 아직 더 공부해야 할 분량이 많이 남아있다는 의미이고, 넓이 측면에서는 본인이 전공하지 않은, 심지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무수히 많은 분야에서 무수히 많은 개인이 인류의 지식 발전을 위해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수동적’ 겸손?

학문의 길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학문의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쉬운 예를 들어보겠다.(물론, 이 예를 통해 오히려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글에서 얘기하는 ‘겸손’을 득하지 못한 인간은 이어서 나올 예를 보자마자 달려들어 비난하고 나설 가능성이 커보인다.) 형이나 아버지에게 CPU라는 것에 대해 들은 초등학생 1학년 김 군은 친구들에게 가서 ‘너희는 CPU가 무엇인지 아느냐?’라며 자랑하듯 떠들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중학생 이 군은 속으로 ‘겨우 CPU를 알았다고 아는 체를 하다니, 우습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생인 형에게 ‘오늘 길을 걷다가 CPU를 안다고 친구들을 무시하는 초등학생을 보았다. AMD,INTEL은 알지모르겠다’며 카톡을 보내지 않을까? 컴퓨터를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 박 군은 컴파일러, 운영 체제 수업 시험을 준비하느라 지쳐있다가 이 카톡을 보고 또 다시 비웃는다. ‘너가 비웃는 초등학생이 내가 보는 너의 모습이다’며 말이다. 이런 진행은 그 어떤 분야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누가 어떤 사람일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냥 가만히 있자. 물론, 이것은 매우 수동적인 ‘겸손’에 해당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좋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도 좋다. 수동적 ‘겸손’으로 비롯되어 나중에는 진실된 겸손을 깨우치는 순간이 온다. 누가 어떤 사람일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아는게 없다. 진짜 안다고 할 수 있는게 뭔지 모르겠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도 사실 모르는게 있었다.

‘안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안다’는 것과 ‘들어보았다’ 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회화에서 우리가 ‘안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사실은 ‘들어보았다’를 의미할 때가 많다.(A:”칸트에 대해서 아니?”, B:”응, 알아'”/B가 철학 학사 전공에, 칸트 전공이라 알까? 아니면 그냥 칸트라는 인물에 대해 들어보았던걸까?) 논쟁으로 발전할 경우 이 차이가 심각하게 작용하는데, 다른 사람과 내가 모두 ‘안다’면 공유해야할 배경지식을 사실은 어느 한 쪽이 가지고 있지 않아서 결론 도출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그런 상황이다. 여기서부터는 더욱 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안다’라는 단어를 재규정할 사회적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안다’라는 단어는 내가 그것과 관련하여 일정 시간 이상 읽고, 공부했거나, 그것과 관련한 전공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아는 것’이 아닐까?(*알다라는 단어가 원래 그런 의미로 쓰인다고 주장하는 독자가 있을 염려에 덧붙인다. [출처:국어사전] 알다 : 1. 교육이나 경험, 사고 행위를 통하여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갖추다, 2. 어떤 사실이나 존재, 상태에 대해 의식이나 감각으로 깨닫거나 느끼다. 등, 심지어 유의어로 등장하는 단어들은 더욱 심오하다. 1. 기억하다, 2. 깨우치다, 3. 납득하다)

자신감 vs 겸손함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라고 물을 시점이 되었다. 결론은, 겸손하자는 말이다. 다만, ‘겸손함을 전면에 드러내며 사는건 자신감의 결여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자신감과 겸손함은 병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겸손하다는 것이 그 사람은 자신감이 부족해라는 말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자신감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겸손하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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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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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낱 개인 블로그에 글을 작성할 때에도 누가 와서 볼지, 어떤 비판을 받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면서 한치의 오해 없이 내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 수 차례 처음부터 찬찬히 다시 읽으며 수정을 한다. 감히 비교하기에도 벅차지만, 문학에서의 퇴고에 해당하는 과정일 것이다. 내 머리속에 떠도는 여러 생각이 글의 형태로서도 읽는이에게 오해가 없이 전달될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새로이 느끼는 과정에 있다.

학창 시절부터, 군 시절까지 소위 ‘필력’은 뛰어나다고 자부해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든, 혹은 주제가 모호하든 관계 없이 주어진 환경 아래에서 최적의 결과물을 적어내곤 했다.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블로그에 게제하는 글에는 제한 시간도 주제의 모호성도 없다. 본인이 주제를 정할 뿐만 아니라, 내가 쓰는 글을 퇴고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는 셈이다. 따라서, 작성되어 세상의 빛을 본 내 글이 수준 이하일 경우, 비난은 모두 내가 감수하는 것이다.

발표문이나 낭독문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발표/낭독되고 난 후에는 폐기되기 마련이다. 그 것이 역사적이거나 큰 의미를 갖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블로그의 글은 그것과도 사뭇 다르다. 내가 블로그를 폐지하지 않는 이상은 적절한 검색어 혹은 링크를 기억하는 경우, 그 주소를 입력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내 글을 다시 확인하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건적 영구성을 지닌다.

지금까지 나는 꽤 많은 글을 읽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것이 철학서 이든지, 법학 기본서이든지, 컴퓨터 서적이든지, 혹은 웹사이트상 글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직접 주기적으로 중/장편의 글을 작성하려고 하니 내가 읽은 양이 오히려 아직도 적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농부가 여러 작물의 씨앗은 구분할 줄 알면서도, 정작 수확할 때의 실수가 잦은 느낌이랄까. 문장의 마무리라든지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접속어 등을 더 다듬을 수 있어야 겠다.

사실은, 블로그에 게제하지 않고 저장해둔 쓰다만 글들이 여러편 있다. 어느 때고 그 주제에 대해서 생각이 추가되거나 할 때 돌아와서 편집하고는 한다. 이제는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막상 업로드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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